2008년 07월 24일
늙어가는 슬픔
어느날인가 폴아웃2를 하게 되었다. 원래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건 워낙이 재미있어서 ...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를 단어 몇개만으로 의미를 유추해가면서 참 흥미진진하게 했던 것 같다. 심지어 폴아웃2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 대한 내 선입견마저 바꿨다. ' 이거 알고보니 재미있는거였네여 ㅎㅎ ' 발더스 게이트는 출시 이후 몇년이나 지난 다음에 해봤던걸로 기억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한물 갔을 때 뒤늦게 접했다는 것. 유저분이 만드신걸로 알고 있는 한글패치를 깔아서 했었는데, 지금은 내 인생의 게임에 꼽힌다.

물론 나도 남들처럼 울티마니 위저드리니 바즈테일이니 조금씩 건드려보면서 컸다. 클리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그래서 난 어느 순간부터인가 ' 나는 정통RPG를 좋아하는구나 '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일본식RPG도 꽤 좋아했었지만, 일본식RPG 좋아한다고 북미식RPG 싫어하리라는 법도 없는거고 ...
그렇게 다시 몇년이 흘러, 발더스 게이트의 제작사인 바이오웨어에서 신작RPG를 내놓는단다. 그게 네버윈터나이츠, NWN였다. 예약한정판을 샀다. 우리나라 예약한정판 사은품의 특징은 좆같이 구린 퀄리티의 기념품 ( 좆구린 목걸이에 달린 금속 펜던트였던 것 같은데, 마무리가 잘 안되어 있어서 금속 끄트머리에 뾰족한 돌기가 나와있었고, 그게 꽤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 과 함께 게임을 손에 넣었다.
집에와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인스톨. 차분해지려고 노력하면서 게임을 실행했다. 헉 ... 뭐 이런 좆병신같은 게임이 ?!?! 네윈나를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을, 처참한 번역 탓이었다. 그래서 한글패치 제거법-_-을 찾아서 영어로 게임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울티마나 바즈테일을 할 때에 비해 이때의 내 영어실력은 꽤 나아진 편이라, 게임 이해와 진행에 별 무리가 없었다. 드디어 ! 몇년만에 다시 ! 정통RPG를 즐길 수 있게 된거야 ! 라고 기뻐하며 플레이를 했다.
한시간을 플레이하고, 두시간을 플레이하고, 대략 10시간 남짓 플레이했을 때, 바쁜 일이 생겨서 잠깐 게임을 손에서 놓아야했다. 그리고 그 바쁜 일을 처리하다가 문득 든 생각. 원래 게임이든 뭐든 재미있게 하다가 중간에 관두면, 아무리 잊고 싶어도 더 하고 싶어서 계속 뇌리에 떠올라야 정상이다. 즉 네윈나를 재밌게 하다가 중간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중단하게되더라도, 여전히 하고 싶어서 어쩔줄 모르는게 보통이다. 근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뇌리에서 네윈나는 씻겨나간 듯 자취가 없었다. 네윈나 재미없나? 급한 불을 끄고 다시 플레이를 하려했지만, 그제서야 깨달았다.
' 아, 이거 재미없군요. '
여러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결론은 그거였다. 네윈나는 내게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네윈나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다들 알다시피, 이게 재미없는 게임은 절대로 아니다. 꽤 많은 인정을 받고 있고 다양한 매니아들을 만들어낸, 말하자면 바이오웨어의 또다른 명작 프랜차이즈들 중 하나였던 거다. 그럼에도 유독 내게는 재미가 없었다.

다른 사례도 있다. 오블리비언. 이거 지대로 명작이라고 소문난 RPG다. 베데스다라는 걸출한 회사에서 만든 정통RPG의 적자라는 소리까지 듣는 명작-정통-RPG. 근데 난 이게 왜 그리도 재미없었는지. 맛만보고 넘어가기엔 뭔가 더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한 20시간 가까이 플레이했던 것 같다. 메인 스토리 따라가다가 곁눈질도 좀 해보고, 이런저런 잡다한 짓거리들로 시간을 보내보기도 하고 ... 근데 솔직히 초반 2시간빼고는 정말 재미없었다. 그저 꾸역꾸역 하면서 ' 뭔가 나오겠지 ' 라는 기대감을 품는 것말고는 딱히 어떠한 흥미도 끌지 못했다.
그제서야 난 내 취향을 재고해보기 시작했다. ' 난 분명 정통RPG를 좋아한다. ' 그리고 네윈나와 오블리비언은 정통RPG이므로 이건 재미있어야 정상인데, 그렇지가 못해.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
여러가지 방향으로 생각을 해봤지만 원래 중이 제 머리 깍기는 어려운 법이라, 쉽게 해답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찾아낸 것은, ' 나는 정통RPG를 좋아하는건 아니다 ' 라는 거였다. 그래, 첫 전제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던거다. 물론 발더스 게이트와 폴아웃은 정통RPG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 게임이 정통RPG여서 좋아했던게 아니라, 그저 재미있어서 좋아했던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들 게임의 어디를 나는 재미있게 즐긴건가? 라는 질문이 또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답은 ' 파티플레이 ' 였던 것 같다. 여러 캐릭터를 나 혼자 컨트롤하면서 이런저런 전략들을 세워 다양한 방법으로 전투를 수행해나가는 것. 그게 내가 폴아웃와 발더스 게이트에서 즐겼던 부분이었다. 근데 이런 스타일의 게임 플레이가 반드시 정통RPG에만 있는건 아니다. 물론 그렇다. 대표적으로 SRPG들이 그렇다.
실제로 나는 SRPG를 무척 좋아한다. ' 내 인생의 게임 ' 리스트에서 발더스 게이트만큼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게임들 중에는 프론트 미션이 있고, 디스가이아의 플레이타임은 아마도 한 300시간이 넘지 싶다. 아쉽게도 슈로대는 캐릭터성이 너무 강해서 좋아하지 못했지만, 이런 스타일의 게임들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번 E3에서 베데스다가 만들고 있다는 폴아웃3의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안타깝지만 이 게임은 내가 아는 폴아웃2나 발더스 게이트 등에 가깝다기보다 오블리비언에 훨씬 가까우며 하프라이프랑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내가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분야에 속한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어릴적 소꿉친구를 떠올리며 참 예뻤지. 귀여운 애였는데. 지금은 아마도 아줌마가 되었겠지만 여전히 그럴거야. 라고 생각하다가, 실제로 만났을 때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당혹감, 그리고 내 기억 속의 그 아이가 이제는 없다는 현실을 대면해야하는 조금의 쓰라림같은게 있다. 이제 폴아웃2는 우리 마음 속에만 있는거죠. ㅎ긓극흫긓긓그그그흑흐긓긓긓그흑흐그흐긓흑흑흐흑흑흐긓ㄱ흑흐긓그흑흑흐긓긓그흑흐긓긓긓긓그흑흑흑흑그흑흑흑흑흑흑그흐긓그흑흐긓그그흑흐긓그흑흐그흐긓그흐


# by | 2008/07/24 11:55 | 잡담질 | 트랙백 | 덧글(9)

